박진아

박진아와 이성휘의 대화

박진아, 이성휘
2019

『Night for Day 박진아』, 헤적프레스, 2020

편집: 이한범

회화를 전시하기

이성휘(이하 이): 제가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6년 175갤러리에서의 ⟪현상학적 보기⟫ 전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 성곡미술관에서 개인전 ⟪Snaplife⟫를 봤고요.

박진아(이하 박): ⟪현상학적 보기⟫는 진휘연 교수와 정신영 평론가가 기획한 전시였고 저는 <로모그래피> 시리즈로 참여했습니다. 이 전시 전에도 개인전을 두 번 했었지만, 거의 처음부터 제 작업을 보신 셈이에요. 첫 번째 개인전은 2002년에 사간동 시절의 금산갤러리에서였고, 두 번째 개인전은 2005년 금호미술관에서의 ⟪여가(餘暇)-금호영아티스트⟫였습니다. 이 전시에서 <로모그래피> 시리즈를 보여주었죠. 제가 작품을 소개할 때에는 대개 <로모그래피> 시리즈부터 보여줍니다. 되돌아보면 이 연작과 현재 하고 있는 작품이 연결되는 점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지금 다루고 있는 관심사를 당시에도 다루고 있었던 거죠.

이: 2001년 정독도서관에서의 전시 ⟪무한광명새싹알통강추⟫는 영국 유학 후 서울로 돌아오셨을 때 참여하신 건가요? 전시 제목이 특이한데요. 



박: 영국에서 작업한 작품들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그것들을 들고 와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 제목은 당시 인터넷에서 떠도는 과장된 표현의 신조어를 모아서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고(故) 박이소 작가, 이영철 큐레이터, 김미진 큐레이터 등이 기획하셨고요. 박용석 작가, 권자연 작가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근래의 전시 중에서 찾아보자면 미술대학 학생과 현장에서 활동 중인 작가를 섞은 다수의 젊은 작가 전시라는 점에서 커먼센터에서 열렸던 ⟪오늘의 살롱⟫(2014) 전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라면 ⟪무한광명새싹알통강추⟫ 전시는 회화 전시는 아니었다는 것이에요. 오히려 회화 작품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의 젊은 작가들은 설치(installation)나 비디오, 개념미술 등을 주로 하던 때였으니까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대안공간 풀, 대안공간 루프 등의 대안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무한광명새싹알통강추⟫도 그러한 맥락에서 기획된 전시였고, 저에게는 대학원 졸업 후 한국에서 처음 참여하는 기획 전시였어요.

이: 전시 장소가 정독도서관이었다는 것도 참 독특하네요.

박: 새로운 미술을 보여주는 기획이었던 것이죠. 



이: 그 다음해에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The Show⟫(2002) 전에 참여하셨죠?

박: 최두수 작가가 기획했고 홍영인, 정수진 작가 등이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이 전시들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박: 제가 신세대라는 자각을 했죠(웃음). 당시 인사동에 있었던 인사미술공간은 젊은 작가가 중심이 되는 전시 기획을 많이 하던 중요한 공간이었어요.

이: 제가 회화 전시에 대해서 생각 해 본 계기는 ⟪네온 그레이 터미널⟫(2014) 전시부터 였습니다. 김선정 큐레이터가 기획하시고 저는 실무를 담당했는데, 전시 기간 동안 많은 화가들이 전시를 보러 왔었고 그들이 해준 얘기들 때문에 이후 제가 회화전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박: 그 이후 회화 전시 기획을 많이 하셨죠? 특히 젊은 작가들의 회화 전시를 주로 하셨고요.

이: 2015년에 ⟪두렵지만 황홀한⟫이라는 젊은 화가들의 전시를 기획했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림을 볼 줄을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요. 그림 보는 방법은 작가들에게 배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시를 해야 하니 일단은 그림을 정말 열심히 들여다봤습니다. 박진아 작가님이 “회화는 이미지이자 물질이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제가 회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할 때 그 말에 기대어 그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박: 그 말에 동의하세요? 사실 너무나 쉬운 말이죠.

이: 회화를 보는 데 있어서 그 말보다 도움이 되는 말을 지금까지는 못 찾았어요.

박: 영광입니다. 작가들에게 그림 보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네온 그레이 터미널⟫ 전시를 보러 온 작가들이 다음 세대의 회화에 대해서 많이 얘기했다고도 들었어요.

이: 예, 노충현 작가나 문성식 작가 등이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또 화가들이 작업실에서 작업만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견을 얘기하지 않는다고도 했죠. 그래서 ‘그럼 화가들을 좀 모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두렵지만 황홀한》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 기획한 《트윈 픽스》 전시에서 저는 두 시기의 작품을 다루었는데요, 하나는 제가 2000년대에 보았던 작품들, 또 하나는 그와 10년 차이를 두고 제가 본격적으로 일하고 있을 때 눈에 띄는 작가들의 작품들이었어요. 이들을 같이 놓고 보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활동을 시작했던 몇몇 회화 작가들이 그 이전과는 많이 다른 성향의 회화를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작가의 수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관심 있게 보고 긴밀하게는 아니더라도 계속 작품의 변화를 지켜보아 왔죠.

이: ⟪무한광명새싹알통강추⟫ 전시를 통해 작가님의 작품을 접한 박이소 작가나 이영철 큐레이터,김미진 큐레이터가 어떻게 생각했고 말하셨는지 궁금해요.

박: 박이소 작가의 경우 저와 영국에서 같은 집에 살았던 이주요 작가를 통해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박이소 작가는 제 작품에 대해서 웃기다고 말하셨다고 들었어요. 화가를 한다면서 무슨 휴지를 그리고 그러냐고…아마 그런 점을 재미있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분도 작품에 힘을 빼곤 하시니까.

이: 그분은 힘을 빼지만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하셨죠. 반면 작가님은…

박: 저는 정말 힘이 없어서 뺀 것이죠(웃음). 저 나름 무언가 웃기다고 하면서 그렸지만 대체로 그게 다른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는데, 제가 혼자서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린 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제 첫 개인전을 보고 젊은 작가 전시가 지나치게 세련되다는 평을 했다고 듣기도 했어요. 왜 세련되다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나중에 이영철 큐레이터가 기획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보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죠. 내용이든 시각적이든 노골적이고 ‘센’ 작품이 많더라고요. 정체성을 주제로 하고, 고통을 날것으로 드러내고… 그런데 제 작품은 밋밋하고 그게 무슨 내용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잖아요. 잘 안 보여주는 것이 젊은 작가 답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젊은 작가는 다 소리를 질러야 되나 하는 생각이었죠. 


이: 이후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고 몇 년 뒤에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에 오르고 작가로서 상당히 많은 관심을 받으셨어요.

박: 저의 첫 번째 개인전의 경우 보러 온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2002년 금산갤러리에서의 그 전시는 운이 좋아 우연히 하게 된 전시였는데요, 갤러리에서 계획했던 전시 하나가 갑자기 취소되면서 두 달 만에 급하게 전시를 하게 된 경우였거든요. ⟪여가(餘暇)-금호영아티스트⟫도 관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전시 기간도 열흘이 안 되게 짧았고, 앞뒤로 저보다 많이 알려져 있던 젊은 작가들 전시가 있었거든요. 제 전시 앞으로는 송명진 작가가, 뒤로는 정재호 작가가 전시를 했어요. 넓게 보면 저와 묶일 수 있는 같은 세대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활동이 많아진 것은 2008~2010년 경이었던 것 같아요. 2008년 제7회 광주비엔날레에 걸었던 작품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당시에는 비엔날레에 회화가 걸리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눈에 띈 게 아닐까 싶어요.

이: 2007, 2008년이면 미술시장과 아트 페어가 엄청 커질 때 아닌가요? 걸면 다 팔린다는 말을 사람들이 하고 다녔죠. 참 희한한 분위기였어요. 



박: 그때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 Korean International Art Fair, KIAF) 도 잘 되었고 모든 미술 관련 사업이 다 잘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글로벌 금융위기로 열기가 사그라들기 전까지는. 아트 펀드도 생겼었고. 저는 당시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레지던시를 하고 있었는데요, 제 얘기는 아니지만 컬렉터가 스튜디오 방문을 하러 와서 작품을 바로 사는 일도 있었죠.

이: 서구의 갤러리, 미술시장 제도가 들어오고 우리나라에 정착되면서 생긴 현상 이었을까요?

박: 글쎄요, 뭔가 다른 외부 요인이 있지 않을까요? 당시에 워낙 투자 열풍이 있었고 부동산 투자가 까다로워지면서 미술품에 투자하는 현상이 생겼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미술대학에서도 빨리 졸업해서 작품 팔아야 한다는 말이 수업시간에 나올 정도였습니다. 저에게는 졸업하자마자 작품을 많이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어요. 그리고 중국 미술시장이 크게 성장할 때이기도 했고요. 중국 현대 회화가 주목받으면서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학생들도 빨간색 얼굴 그림 많이 그렸죠. TV에서도 중국 미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어요.

이: 제가 그 5부작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미술>(2007)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했었어요. 도시의 부흥을 중심으로 500년간의 미술의 주도권의 변화를 다룬 프로그램이었죠. 로마와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파리와 인상파를, 뉴욕과 미국 현대미술을, 런던과 yBa(Young British Artists)를, 그리고 중국 미술을 아시아 미술시장과 함께 보여주었죠. 결국은 시장 얘기였는데, 중국의 경우도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돈이 쏟아졌기 때문이에요. 그러고보니 참 시의적절하게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었어요.

박: 예, 그때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었는데 학생들도 많이 보고 크게 영향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회화가 다시 주목을 받았는데요.

박: 하지만 시장에서는 전통적인 구상회화나 소위 ‘회화적인 회화(painterly painting)’보다는 특이한 기법이나 재료를 쓴 아이디어가 튀는 작품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제가 《트윈 픽스》나 《올오버》(2018)를 기획할 때도 생각한 것인데 50대 회화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정확하게 말하면 회화에 대한 시대적 담론과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박: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이 회화를 주류로 보지 않았을 때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회화는 상업적 관점에서만 논의되거나 작은 개인전으로만 소화되곤 했겠죠. 저는 여전히 회화를 하고 있는 작가들은 많이 있는데 사람들이 안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나라 동시대 회화 담론이 없죠. 지금도 그림 그리는 사람들끼리만 얘기가 있을 뿐이지 크게 상황이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2016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30주년 기념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를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어요. 소장품으로 한국 현대미술, 동시대 미술을 조망하는 전시였는데, 60, 70년대에는 회화가 많고 80년대에 민중미술이 나오다가 90년대 이후에는 회화 작품이 없더라고요. 한 작품 정도 있었나? 물론 여러 흥미로운 작품이 많았지만 민중미술 이후 아예 회화 작품이 없는 것은 이상했어요. 지난 30년간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사람은 많이 있었을 텐데요.



이: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전시에서 1990년대, 2000년대를 보여주는 작품들로는 설치, 영상, 사진 작품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네요. 



박: 이 전시가 유난히 회화를 제외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소장되어 있는 회화 작품도 그리 많지는 않나 보다 싶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회화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아쉽게도 그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30년 정도를 건너 뛰고 2019년 현재의 회화에 대해서 얘기하기는 어려운데요.



이: 2000년대에 젊은 작가로 중요하게 언급된 정수진 작가나 박세진 작가가 생각나네요.

박: 많은 작가가 있을 텐데요, 상업적 성공과 미술 담론이 분리되어 조명되는 것 같아요. 미술관이나 미술 담론에서 거론되는 작품과 미술시장에서 활발히 판매되는 작품이 서로 다른 것처럼, 저는 이것이 현재 한국 미술의 특징 중 하나로 보는데요. 서부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미술에서는 미술관과 시장이 상당히 겹쳐 있잖아요. 한국의 경우 이 겹쳐진 영역에 속하는 작가는 극소수 인 것 같습니다.

이: 요즘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기성세대들은 작가들이 상업적으로 보이는 것 자체를 좀 꺼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20, 30대 작가들의 경우 그런 성향이 거의 없죠. 젊은 작가들은 비엔날레나 평론, 시장 등을 구분하지 않더라고요. 자기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하니까요.

박: 그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전업 작가로 살려면 그렇게 되어야죠.

이: 2007년~2008년 얘기를 하다가 미술시장에 대해 대화하게 됐는데요, 당시 미술계에서 키아프를 많이 키우려고 했었고 상업성 뿐만 아니라 작가적 역량을 발굴하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박: 한편 당시 상업적으로 소비되다가 사라진 젊은 작가들도 많은 것으로 알아요. 졸업전시에서 감각 있어 보이고 특이해서 눈에 띄는 작가들 작품을 파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너무 초기에 상업적으로 큰 조명을 받다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2010년 경에는 성곡미술관에서 좋은 전시들이 많이 열렸어요. 중요한 개인전을 볼 수 있었죠. 성곡미술관이 큰 규모의 전시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박: ‘내일의 작가’라는 공모 프로그램이 있었죠.

이: 그 때 어느 분이 성곡미술관을 이끄셨었죠?

박: 이수균 큐레이터가 계실 때 공모를 통해 전시가 계획되었고, 전시를 할 때에는 다른 분이 실장으로 계셨습니다.



이: 그 공간의 크기가 좋았었어요. 작품이 참 적절하게 선별되어 전시가 이루어졌고 작가님의 역량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 그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품의 크기가 확 커졌고 방향성도 분명해졌어요. 전시로서 물리적 공간을 다루는 경험을 처음으로 제대로 해 볼 수 있었고요. 그래서 저에게도 중요한 전시로 남습니다. 걸었던 작품에 담긴 내용 자체가 전시를 준비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전시 공간과 작품을 연결해 하나의 큰 덩어리로 묶고자 의도했었고, 이를 구현해 본 경험을 통해 저 스스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그렇게 전시를 만드는 게 기관의 큐레이팅이었나요?

박: 이 전시는 저의 기획이었습니다. 공모로 작가를 뽑고 주어진 공간을 스스로 해석해 전시 내용을 만든 것이죠. 워낙 규모가 있었던 전시라 예산도 많이 부족했는데, 같은 해에 했던 에르메스 미술상 전시의 지원금이 큰 도움이 되었죠. 당시 같이 일하던 원앤제이갤러리도 여러 도움을 주었고요.

이: 시기가 잘 맞물렸군요. 여러 자원이 동원된 공이 많이 들어간 전시였고요. 작품들이 미술 공간, 미술인들을 담았는데 성곡미술관 공간과 잘 맞아떨어져 힘이 있었어요.

박: 그렇게 큰 규모의 물리적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였어요. 덕분에 작품과 전시 공간의 규모에 대한 감도 생겼고요. 그 때 한 번 커진 작품의 크기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더라고요. 작품의 크기를 줄이려고 아직까지 노력 많이 합니다(웃음).
큰 규모의 전시 공간을 적극적으로 다루어 본 그 다음 전시가 하이트컬렉션에서의 전시 《네온 그레이 터미널》이었습니다.

이: 그동안 했던 전시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전시를 통해서 이기 때문에, 회화 전시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보고 싶어요. 그간의 전시에서 좋았던 점과 좋지 않았던 점, 향후 해보고 싶은 전시는 있는지 등을 집어주세요.

박: 먼저 2014년 전시를 했던 하이트컬렉션은 그동안 같이 일해 본 기관 중 가장 좋은 경험으로기억합니다. 이성휘 큐레이터가 역할을 잘 해 주셨죠. 성곡미술관 전시도 그렇고 전시 자체로는 확실히 큰 공간을 보유한 미술관 전시가 작가로서 기억에 남는 전시이긴 하네요. 준비를 하면서도 전시가 하나로 묶여 제시되는 완성도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고요.
《네온 그레이 터미널》은 저에게 중요한 전시였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전시를 열고 나서 몇몇 부분에 대해서 판단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전시 이후 작품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습작으로 공항을 그려보고 있을 때 전시 제안을 받았고, 1년이 채 안되어 전시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전시 준비 기간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작품 수를 늘이는 데 여념이 없었어요. 그리면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잊어버려 작품이 지나치게 묘사적으로 된 것 같아요. 공항이라는 게 특별하고 낯선 소재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는데요, 예를 들어 처음으로 익명의 사람이 다수 등장한다든지 직선이 많다든지, 또 회색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등등 새로운 과제를 내 식대로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있었고요 완성된 작품에서 그리는 과정이나 순간성이 더 드러나고, 좀 더 공기가 도는 작품이 되었어야 했는데 싶었습니다. 전시에서는 공항을 재현하는 것 까지만 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인데 항상 작가는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니까요.
미술관의 지원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더 욕심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요. 앞으로는 조금 더 긴 시간을 두고 준비한, 기관의 지원이 있는 전시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이: 저는 작품의 크기가 아쉬웠습니다.

박: 당시 작업실이 집이었어요. 작업 공간이 좁은 편이었고 가정집에서 거대한 공항을 그리니 소재와 너무 다른 환경이라 그 영향도 있었습니다. 전시 공간을 다루고 전시장의 건축 구조와 작품 내의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꽤 만족스럽게 했던 것 같습니다. 작곡가와의 협업도 좋았고요.

이: 전시장 안 쪽 기둥 뒤에 걸었던 <홀웨이>(2013) 작품이 떠오릅니다. 그 작품이 지닌 적막함, 서늘함, 비어있는 느낌이 장소와 잘 어울렸어요.



박: <홀웨이>는 바로 그 위치에 거는 것을 분명히 의도하고 그렸던 작품입니다. 공항은 기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용도를 잘 모르는 빈 공간이 많아요. 또 회색으로 덮여 있으니 하이트컬렉션 지하공간이 주는 인상과 잘 맞았죠. 전시장 중앙에 영구 소장되어 있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도 마치 공항에 설치된 조형물처럼 느꼈고요. 전시의 주제가 공항이 아니었으면 상당히 다루기 곤란한 설치 작품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이: 앞으로 공항을 더 그려 보실 생각은 있나요?

박: 작년에 하나 그려 보긴 했습니다. 4년쯤 지나 다시 그리면 어떨까 궁금하여. 우선 색감이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네온 그레이 터미널》을 끝내고 나서 제가 색채 실험을 했었거든요. 이전의 작업이 색을 재현적으로 쓰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2014년 이후 인위적인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심지어 하이트컬렉션 전시장을 배경으로 한 <노란 바닥>(2016)에서는 회색 바닥을 노란 원색으로 바꿔버렸죠.

박: 네. 회색의 반대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던 것 같은데 차차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리고 있는 작품은 아예 다채로운 색이 있는 빛을 다루고 있고요.



이: 2019년 작품들은 사진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등이 떠오릅니다.

박: 무슨 영화나 드라마가 생각나는지 궁금하네요.

이: 예를 들어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같은 거요. 염력의 공간과 현실 공간을 넘나드는 설정의 드라마인데, 작가님의 2019년 작품들이 유독 이 드라마에서 받은 기묘한 느낌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 재미있네요. 그런 느낌을 제가 원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다른 세계가 겹쳐지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고 할까요. 가능한 이야기를 살짝 제안만 하고 이후 상상은 보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배움의 안과 밖

이: 학창시절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그때 미술계를 어떻게 인지하였는지, 학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박: 미술계 현장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고 해야죠. 그리고 학부 때는 교수님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수업 자체를 젊은 강사 선생님들이 주로 맡으셨으니까요. 대학원에 가서는 그 관계가 달라지는 것 같던데 안타깝게도 제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학부 때 회화 수업은 권여현 선생님, 최진욱 선생님 수업을 들었던 게 생각납니다. 당시 젊은 작가로 한창 활동하시면서 수업을 나오셨어요. 회화 수업은 아니지만 혼합매체 수업으로 윤동천 선생님 수업을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있고요, 사실 학부 때는 회화를 수업 과제로만 했지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1990년대에 새로 생긴 뉴미디어 수업들, 예컨대 비디오아트, 컴퓨터드로잉, 혼합매체, 설치 등의 수업을 궁금해 하고 훨씬 관심 있게 수강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회화는 부담스러워 했어요. 잘 그리는 사람도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 그 때 ‘잘 그린다’의 기준은 뭐였나요?

박: 그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회화는 뭔가 거대하고 무거웠던 거죠. 회화에 대한 부담은 어쩌면 회화를 전공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회화는 역사가 깊고 거대하다는 부담? 대학에 오기 전에는 인상파 그림 등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이 그림들은 동시대 미술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회화는 동시대 미술이 아닌가라는 의문도 갖게 되고. 또 미술사 공부를 하면 20세기 초, 중반에는 화가들이 야심 차게 회화로 아방가르드를 하는데 과연 지금 회화로 아방가르드가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들고. 전시장에 가면 또 설치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1990년대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래서 학부생 때는 회화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 혹시 민중미술에 대한 얘기는 학교에서 있었나요? 민중미술 전시가 1990년대 중반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박: 4학년 미술사 시간에 현대 회화를 다루며 아주 잠깐 배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최진욱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언급을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분이 민중미술에 적극 가담하지는않으셨어도 여러 모로 연결되어 있는 분이니까요.

박: 많이 진지한 분위기의 수업이었어요. 열심히 가르치시고 학생들도 좋아했던 수업으로 기억합니다. 실험적인 커리큘럼도 있었는데, 한번은 수업 중 신림동으로 답사를 갔어요. 재건축 현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동네 답사 후 소재를 찾아서 회화 작업을 하는 과제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현장과 미술작품을 연결하려고 하셨던 것 같네요. 하지만 학생들은 어려워하고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 과제가 기억에 남는 것을 보니 특별한 경험이었나봐요.

이: 대학원 때는 어땠나요?

박: 아무래도 학부와 대학원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죠. 대학원 과정의 특성이기도 하고. 첼시미술대학이라는 학교 자체의 특성도 있었을 거에요.
제가 다닌 대학원은 커리큘럼 자체가 거의 없는 학교였어요. 학생이 딱히 학교를 안 나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분위기 였습니다. 저는 다른 문화를 접하며 배우는 게 많았고 또 학생들끼리 보고 배우는 게 많았죠. 생각해보면 미술학교라는 곳이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학교가 주는 것보다는 학생들끼리의 교류에서 얻는 게 많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야심 찬 학생들도 몇 명 있었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일종의 강의가 있어서 듣고 싶으면 들으러 가면 되었어요. 격주로 이론 수업과 외부 작가 특강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특강은 작가일 때도 있고, 기획자일 때도 있고, 갤러리스트일 때도 있고요. 기획자나 갤러리스트가 왔을 때는 학생들이 눈에 띠려고 질문도 많이 하고요. 저에게는 그런 서바이벌을 위한 적극성이 신기했고 나름 배울 점이었어요.

이: 동시대 미술 현장을 바로바로 접하게 하는 학교였나 보군요.

박: 네. 프로그램은 그렇게 짜여 있는데 강제성은 전혀 없었어요. 특강을 듣고 싶으면 들으러 오면 되었죠. 영국도 학교마다 많이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골드스미스대학교의 경우에는 시키는 게 아주 많다고 들었어요, 읽어야 할 책도 많고. 20년 전 일이라 지금은 또 다를지 모르겠네요. 그때가 영국 미술이 yBa 이후에 많이 성장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2000년에 테이트 모던이 문을 열었고. 새로운 갤러리들이 많이 생겼고요. 특히 런던 동쪽, 그러니까 이전에는 공장 지대였던 거친 동네에 갤러리와 대안공간 등이 여기저기 생겼었죠. 잘은 모르지만 돈도 많이 돌았던 것 같아요. 거품도 많았겠죠. 그런 분위기에서 런던에 있었던 게 나름대로 공부라면 공부였습니다.



이: 90년대 초, 중반에 yBa 세대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놓은 뒤 영국이 동시대 미술을 주도하려고 이를 키울 때였던 것 같네요. 아트 페어도 생기지 않았어요?



박: 제가 무관심했는지 당시에는 프리즈 아트 페어에 대한 소식을 들어본 기억이 없네요. 아무튼 미술계의 분위기가 꽤 자극적이었어요. 동시대 미술이 대중문화처럼 다루어 졌고요. 이상한 작품도 많이 봤습니다.

이: 터너 프라이즈가 화제가 많이 되었죠?



박: 네. 그 상을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를 하더라고요. 저는 동시대 미술을 그렇게 대중문화로 다루는 것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영국 정부에서도 꽤 전략적으로 동시대 미술을 키우려 했던 것 같고요. 또 영국 특유의 타블로이드 가십 문화도 있어서 작가들이 연예인처럼 연예 뉴스에서 자주 다루어지기도 했고. 찰스 사치가 이런저런 컬렉션을 하고 개인전을 통째로 사고 다니면서 많은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고요.

이: 그런 분위기가 5~6년 후의 한국에서도 생긴 것 같네요.
영국 대학원 시절 이후 작가님 개인적으로 가장 바뀐 것은 무엇인가요?

박: 대학원을 다니면서 회화를 하기로 결정했어요. 학부 때는 설치 미술 등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물론 작가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지만, 여하튼 작가가 된다면 회화를 하겠다고 생각했죠. 어렴풋이 내가 회화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이: 영국에서 그렸던 그림은 어떤 그림들이었죠?

박: <로모그래피> 시리즈 이전의 그림들은 크기도 크지 않고 최대한 가볍게 그리는 것을 의도했어요. 물감 층을 아주 얇게 칠하고, 그래서 물감이 줄줄 흐르고. 마치 손에 힘이 없는 사람이 그린 것처럼… 그림 위에 낙서처럼 드로잉을 하기도 했어요. 내용도 아주 소소한 일상을 담았어요. 약간 비껴서 회화에 접근하고 싶어 했었던 것 같습니다. 재료도 무거운 유화보다는 아크릴 물감을 주로 썼고요. 여러 의미에서 무게 자체를 못 견뎌 했던 것 같습니다. 구도에 있어서는 대상을 많이 잘라서 부분적으로 보여주었고요. 일필휘지와 같은 결정적인 붓질이 없이 주저하면서 그리는 태도를 완성된 그림에서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밖에 그릴 수 없었고요. 한편으론 왜 이렇게 무겁고 힘들게 회화에 접근해야만 하는가라는 반항심을 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는 대상도 휴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고요.


사진, 빛, 어둠

이: 사진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회화를 하면서 사진을 참고하는 게 특별한 의도가 있다기 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웠다는 언급을 하셨는데요. 사진을 참고로 회화를 하는 작가들이 굉장히 많은데 가끔 회화가 사진에 종속되었다는 인상을 주거나 사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사진과 회화가 대립하지 않고 그 둘의 관계가 자유로워 보입니다. 사진은 사진 대로 있고, 회화는 회화 대로 있고. 제가 《트윈 픽스》 전시를 기획하면서 박진아 작가와 전병구 작가의 작품을 나란히 놓았었는데, 전병구 작가의 작품도 분명 사진을 참고로 했지만 사진에 끌려가지 않고 작가의 정서를 화면 안에서 구현하는 데 집중한 작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대의 차이가 있고 두 작가의 화풍도 차이가 있으나 사진을 활용해서 정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나란히 놓아보았어요.

박: 제 작품에서 사진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냥 눈으로 보아서는 보지 못했을 것을 카메라가 포착해 주는 부분이 있고요, 사진을 통해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 인물의 어정쩡한 자세가 한 예이죠?

박: 네, 그런 우연히 발견한, 딱히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중간의 상태가 저에게는 매우 중요해요. 시간에서도 공간에서도 전환되는 성격을 가진 상태를 좋아합니다.

이: 그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박: 영어로는 ‘transit moment’를 그린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공항’이라는 소재도 그 ‘transit space’로서의 성격 때문에 선택했던 것이고요. 언급하신 것처럼 그리는 인물의 동작도 이 동작과 저 동작의 사이에 있는 상태를 그리고 싶어 해서 어정쩡한 동작이 되는 것이고요. 제가 쓰는 유동적인 붓질도 비슷한 의미로 성격이 전환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상태로서의 붓질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고정된 것, 마감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있는 상태를 붓질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죠. 움직이고 있는 상태, 날아가 사라져버릴 수 있는 성격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진이 해결해 준 것이 많습니다.

이: 맨 눈은 보지 않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않는 장면이죠.

박: 눈은 그 순간을 기록하지 않죠. 하지만 사진에는 그런 순간이 너무나 많고요. 더군다나 제가 찍는 사진들은 대체로 연출하지 않고 찍은 사진들이니까요. 때문에 사진의 역할이 크고, 사실 이렇게 사진의 특성을 좋아한다면 아예 사진 작업을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는 일일 텐데요. 하지만 저는 사진 기술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회화의 형식이나 기법에 훨씬 관심이 많아요. 또 저는 사진보다 회화가 직접성과 물질성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지속하는 것에 있어서 저에게는 이 물질성이 꼭 필요하거든요. 회화는 그리는 동안 화면에 물리적 접촉을 계속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요소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미지의 재현 외의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회화의 이미지와 물질성이 둘 다 중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사진의 경우 저에게는 이미지가 훨씬 크게 느껴지고요, 이런 의미에서 회화성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회화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 작품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연속 장면은 아주 초기, 예를 들어 <라디오머리>(2000)와 같은 작품에서도 보이더라고요.

박: 제가 시간을 잘게 나누어 그 한 조각 한 조각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한 조각에 시간을 담으며 그 다음을 제시할 수 있고, 그리고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움직임을 제시하는 것이 회화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도 생각하고 있어요.
최근 스페이스 캔에서 진행한 작가 특강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는데요, 특강 이후 이양희 안무가가 해 준 피드백이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제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그 안무가가 다루는 것들이 겹치는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동작, 시간, 공간,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 등. 제가 강의 중 《Snaplife》 전시에 대해 얘기하면서 당시 관객이 어떻게 전시를 관람하기를 의도 했는지를 설명했어요. 관객이 전시와 작품을 환경처럼 경험하고 회화 작품 안의 공간도 걸어 다니는 느낌으로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죠. 춤도 무대가 있고 항상 관객을 염두에 두고 동작과 각도 등을 정하기 때문에 제 전시 연출에 공감하신 듯 했습니다. 또 화면을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하면 제가 특정 동작을 화면의 특정 위치에 배치하는 것도 무대 연출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이: 무용도 무대가 있고 리허설을 하니 작가님이 새로운 소재를 찾을 수 있겠네요.

박: 제가 사실 무용 공연 리허설을 그려본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런데 인물의 동작이 다른 작품과 많이 다르더라고요. 제가 주로 그리는 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동작, 무의식적인 동작들인데 훈련된 몸이 의식적으로 만든 특별한 동작을 재현해 그리는 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아름다운, 근육이 잘 잡힌 몸을 그리는 것 자체는 재미있는데 작품이 지닌 성격, 저의 원래 의도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용 공연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용수들이 쉬고 있는 모습은 그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동작만 그리고 싶어하는구나 그런 자각을 또 한번 했죠.

이: 언젠가부터, 아마도 미술 공간을 그리고 작품 크기가 커지면서부터 인물의 전신이 화면 안 공간에 깊숙이 들어가게 그리시더라고요.

박: 공간감을 강조하게 되면서 그렇게 그리게 된 것 같습니다. 넓고 큰 공간을 재현하고 싶기 때문에 작품 크기 자체가 커지기도 하고 인물도 주변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고 전신으로 그리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 대상과의 거리가 생기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에서 바라보는 이와 대상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평을 종종 듣습니다.

이: 빛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박: 빛은, 그 중에서도 인공 조명은 근작에서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요, 되돌아보니 이전 작품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더라고요.

이: 빛이 중요했기 때문에 밤을 그리신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박: 네. 물론 구상회화에서 어떤 식으로든 빛을 다루지 않을 수는 없는데, 시기마다 초점을 맞춘 특정한 빛이 있었습니다. <문탠> 연작의 경우는 카메라의 플래시라이트를 다루었어요. 실제로는 없고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인 것이죠. 그래서 대상이 유난히 납작하게 재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2007년, 2008년경 밤 풍경을 그리다 보니 당연히 인공 조명을 많이 다루게 되었고요. 2007년 <긴 저녁> 이라는 작품에서도 조명을 크고 둥글게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경 전시장을 그린 그림에서도 화이트큐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흰 벽과 함께 공간을 비추는 인공조명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요. 흰색을 발산하는 인공 조명이라는 소재는 제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2018년 합정지구에서의 개인전 《사람들이 조명 아래 모여있다》에서는 아예 조명을 핵심 키워드로 삼았죠. 전시 제목에도 조명이나 빛이라는 단어를 넣고 싶었고 그래서 서문을 쓴 방혜진 비평가의 아이디어에 따라 제목도 지었습니다. 최근의 작품에서도 폭죽을 그리고 있으니 인공 빛 자체를 그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여러 가지 색을 발하는 빛이 작품의 주제인 것이죠. 



이: 빛을 덩어리로 표현하는 게 재미있어요. 빛을 그린 부분이 또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거든요. 최근작에서의 빛은 사뭇 심령적 분위기도 자아내고, 이런 분위기에서 앞으로 작품의 방향이 바뀔 것 같다는 예상을 해보고요.



박: 심령적 분위기는 의도했어요. 제가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약간의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가 있거든요. <문탠>을 그리면서도 이 장소는 지구 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을 살짝 해보았고요.

이: 또 어떤 작품이 그런가요? 잘 찾아봐야겠네요.


박: 잘 보이지는 않고요. 초현실로 넘어가기 직전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할까요. 여운을 남기는 정도로만. 작업을 할 때 스스로 재미있기 위해서 혼자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해요. 또 아주 평범한 장면에 약간의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 빛이 그저 단순한 빛 이기만 한 것은 아니네요. 공간이기도 하고 어떤 에너지이기도 하고.

박: 빛이 워낙 사람들에게 영적인 경험을 하게 해주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이: 2019년의 작품 <공원의 새밤 03>은 처음부터 붉은 색조를 생각하고 그리신 것인가요?



박: 네. 빨간 빛을 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원의 새밤 05>는 초록 빛을 그려보려고 한 것이고. 다음 작품은 무슨 색의 빛을 그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아주 하얀 그림 혹은 전체가 다 검은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 아 네, 재미있을 것 같네요. 



이: 연작 형식으로 시기에 따라 작품이 변해왔는데 자연스러운 변화였는지, 혹은 각 시기마다 특별히 외부에서 받은 영향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요.

박: 작품의 소재를 주변에서 찾다 보니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주제가 선택되었는데, 개인전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곤 했었어요. <로모그래피> 시리즈의 경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회화를 좀 정면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네 컷으로 나뉜 일반적이지 않은 형식의 시리즈이긴 했으나, 회화가 무엇이고 회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 연작을 통해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관심 있었던 주제가 현재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2006년 이후 도시의 밤을 그린 작품들은 당시 실제로 밤에 주로 활동하던 저의 일상과 주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요. 그림을 그린 시간도 밤 시간대였고요. 작품은 주로 밤에 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죠. <로모그래피> 시리즈에서도 주로 여가생활을 그렸고 이렇게 밤의 도시에서 유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그리다 보니 누군가 제가 노는 장면을 그리는 작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하는 모습도 그려볼까 하고 생각한 게 미술공간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제가 가까이 아는 일하고 있는 모습이 전시를 준비하는 모습이니까요. 주변에서 소재를 찾는 습관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고요.

이: 그런데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였죠.

박: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점에서 도전해 볼만한 요소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흰 벽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등등. 소소하게는 아는 사람을 그리는 재미도 있었고요. 제가 미술 공간을 그리니 제도비판을 주제로 하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았습니다. 제도비판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의도는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주변 환경을 그리겠다는 태도가 더 많았죠. 기록으로서의 성격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2010년도 쯤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미술제도 안에서 일을 했는가, 전시 공간은 어떻게 생겼고 전시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등에 대한 기록. 회화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때도 어떤 일의 백스테이지를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


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건축물의 실내를 담은 그림이라 직선이 굉장히 많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여기서 사진과는 다른 차이를 보았어요. 분명 사진을 참고로 한 회화인데 이 직선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편안하게 그리셨더라고요. 많은 사진 작가들이 이 직선을 반듯하게 만들고 수직수평을 맞추는 데 굉장히 신경을 쓰거든요. 다들 이 직선 보정을 열심히 하고요.

박: 사진에서는 직선이 왜곡되기 때문이죠. 저는 찍힌 사진에서처럼 벽 선을 휘게 그리기도 했고 똑바로 그리는 게 맞겠다 싶으면 똑바로 그리기도 하고 그랬죠.



이: 사진을 참조해 회화를 하는 작가들 중 보정한 사진처럼 직선을 아주 반듯하게 그리는 경우도 있는데 때로는 그게 더 사진에 종속되어 보이더라고요. 작가님 작품은 직선이 많은 공간을 그렸는데도 선이 반듯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둡니다. 관람자 입장에서는 긴장을 늦추고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박: 조금 다른 얘기로, 작품만 보면 전혀 모르겠는데 작업 과정을 보면 의외로 격자를 그려놓고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꽤 많이 있더라고요. 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법이라 어느 순간 그걸 알고 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밑그림에 격자를 전혀 그리지 않아서 삐뚤어진 선이 많이 사용되는 등 밑그림 그리는 방법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삐뚤어지는 걸 자연스럽다고 놔두는 편이죠.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각이 맞지 않고 삐뚤삐뚤한 선이 불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이: 사실 우리의 눈이 직선을 정말 똑바로 인지하는지 삐뚤어지게 보는지는 알 수 없잖아요.

박: 사람 몸으로 그린 선은 곡선이 되는 게 자연스러우니 손으로 그린 회화에서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신체성을 드러내는 좋은 방법이죠. 또 저는 작품에서 우연성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밑그림이 너무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게 우연성을 증폭시키는 데 맞는 방법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비평과 동시대적 회화사 쓰기

이: 유진상 비평가가 2010년 에르메스 전시를 위해 쓴 글 「속도와 시간」을 다시 읽어보니 회화의 내용과 형식을 나누어 작품을 적확히 평해 주셨더라고요. 지금은 작가님 작품이 속도감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요, 특히 초기의 <로모그래피> 시리즈에서는 속도감이 보였던 것 같아요. 글에서 언급된 빠르고 얇은, 자유로운 붓 터치라는 형식적 특징에 저도 공감하고요. “회화 안에서 재현된 시간은 고정된 시간 혹은 관객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재의 시간”이라는 부분도 상당히 예리하게 짚으신 것 같아요. “화면을 부분으로 나누어 재조합하는 구성”도 중요한 키워드일 테고요.

박: 사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형식을 중요시 하죠. 무엇을 그렸는지 보다 어떻게 그렸는지를 더 많이 얘기하니까요.

이: 어느 순간부터 화가는 화면과 물감과 싸우고 있으니까요.
유진상 비평가는 내용을 논하면서는 작품이 다루는 장소인 강변, 옥상, 정원, 공원 등의 중립적 성격을 언급하고 ‘미증유의 공간’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미증유라는 게 아직 있어본 적 없는 일이라는 뜻인데, 작가님이 공항 연작에서 언급한 ‘림보’라는 개념과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글 말미에는 2007년 이후 작품이 보이는 미술계에 대한 어떠한 언급, 즉 덧없음, 허망함 같은 감정, 망설임과 기대 등을 말합니다.

박: 제가 적극적으로 담으려 한 감정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감정일 것 같아요. 미술계에 그런 허망함 같은 게 있긴 하니까… 그리고 덧없음은 항상 제 작품에서 지향하고 있는 성격이고요. 부질없다는 뜻이라기보다 곧 사라질 것들이라는 뜻에서. 


이: 비평에 대해 일반적인 얘기를 좀 더 해볼까요?

박: 비평하시는 분들이 회화 평론을 어려워하신다는 인상을 종종 받아요.

이: 비평가는 아니지만 저 역시 회화가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림을 보는 것도 어려운 데다가, 상당한 미술사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미술사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해 보고 싶은데요. 저는 미술사 연구자들이 현장에 가능하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일부 미술사가들은 작품을 직접 보기보다는 주로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역사 분석을 선호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론은 저에게는 좀 공허하게 보여요. 비평은 당대의 담론에 집중하고 미술사가 이를 역사와 함께 종적으로 짚어 주어야 할 텐데 그런 글은 잘 보이지 않죠.


박: 지금 얘기만 하는 사람, 과거 얘기만 하는 사람은 있는데 이 둘을 같이 연결해 보지를 잘 않죠. 역사라는 것이 현재와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을 텐데요.
현재의 새로운 것만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요. 지금의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가 되는 것인데요. 
 


이: 제가 학자로서 무척 존경하는 강태희 선생님의 「미술사의 추억」이라는, 2004년에 쓰신 논문이 있어요. 책으로도 출판되었고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미술사가 과거의 것으로 설정되었죠. 전 세계적으로 시각문화 담론에 편입되게 된 미술사가 학문의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한 글이예요. 미술사라는 학문도 유효기간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일하면서는 오히려 미술사는 견고하게 있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골고루 발전하고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고요. 미술사가 빠진 것은 마치 책상에 다리 하나가 없는 느낌이에요. 역사를 엮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박: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재료는 다 있죠. 엮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이렇게 직조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게 우리나라의 특징인 것 같은데, 어쩌면 동아시아 문화의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세대 간의 단절과 전통과의 단절, 빠른 변화 속도 등등 때문에. 현재 상태의 새로운 것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항상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만 얘기하다 보면 몇 년 뒤 또 다음 세대로 옮겨가면 그만이지 작품의 맥락과 의미가 제대로 찾아지지 않죠.


이: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한국미술 다시보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어떤 담론을 형성하며 전개되어 왔는지 연구하는 사업을 진행해 왔는데요, 관련 심포지엄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고요. 이렇게 근래 들어 동시대 미술을 되짚어 보는 행사들이 저는 그래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작가는 당시 단편적으로 했던 생각만 말해도 충분하지만 미술사가는 작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흐름이나 시대상황과 엮어서 작품을 읽어줄 수 있죠.

박: 저도 근래에 작품을 종적 맥락에 놓아보는 것과 역사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작가는 찾아보면 많은데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 같고요. 저도 예전 젊은 작가로서 마치 선배가 없는 것 같고 참조할 작가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유명한 유럽 작가들이 거론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선배를 좀 찾아보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구상회화를 하니까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는 아무래도 민중미술을 보게 되고요, 그 중에서도 민정기 작가를 존경합니다. 또 이후 최진욱 작가나 김지원 작가 작품도 좋아요.
그런데 이왕이면 회화하는 여성 작가를 한번 찾아보고 싶었어요. 분명이 있었을 텐데 잘 안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회화는 오래된 매체이다 보니 얼마 전까지도 남성 작가가 압도적으로 다수인 장르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요. 정주영 작가가 생각났고요, 얼마 전에 이제 작가로부터 노원희 작가를 소개 받았습니다.

이: 2년 전쯤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전시하시고 최근에 작품집도 출간하신 작가죠?

박: 네. 최근에는 방정아 작가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크게 전시를 하셔서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올오버》 전시에서 제여란 작가의 작품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윗세대의 제가 잘 몰랐던 작가들, 하지만 작업을 꾸준히 하고 계신 작가들을 누군가 알려주고 작품의 맥락을 짚어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에 활발히 활동했던 회화 작가들이 누가 있는지 저는 아직도 많이 궁금하거든요.

이: 끝으로 이번 작품집에 대한 기대, 그리고 만드는 과정에서의 소감 등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박: 이제까지의 작품을 책으로 정리해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보여주기 좋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 스스로 한 번 모아놓고 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와 경험이 달라지면서 그리는 태도나 회화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가 있었고, 그러면서도 또 제가 갖고 있던 일관된 관심사도 있는데 작품 이미지를 모아놓으면 이러한 것들이 분명하게 보일 거예요. 또 저도 모르고 있다가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을 거고요. 2000년에 대학원 졸업을 했으니 올해로 20년의 작품 활동을 한 셈이라 한번쯤 정리해 볼만한 시기인 것 같아요. 이것이 앞으로 제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선 저도 알 수 없는 작품에서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이 좀 더 명확해 질 수도 있고요.

*이 대화는 2019년 7월 13일 작가의 작업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